[고조선의 진실] 문헌상의 古朝鮮 영토

‘고구려·부여·三韓은 고조선 계승국가’

윤내현 단국대 대학원장

조선(단군조선)은 우리 역사상 첫번째 국가이면서 단일국가로는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서쪽은 지금의 북경(北京) 근처에 있는 난하, 북쪽은 중국과 몽골의 국경인 얼구나하(額爾古納河), 동북쪽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인 흑룡강(黑龍江), 남쪽은 한반도의 남부 해안선을 국경으로 한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조선은 도읍을 아사달에서 평양성-백악산 아사달-장당경을 거쳐 다시 아사달로 네 번 옮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이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겼다면 그 영토는 상당히 넓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13세기 중국 사학자 증선지(曾先之)가 그린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考)의 지도에는 고조선의 영토가 만주를 포괄하고 있으며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인 만리장성은 발해의 서북쪽에서 끝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중국을 통일한 진(秦) 제국의 영토가 동쪽은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조선과 국경을 접한 곳은 요동(遼東)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서기 전 221년(진시황 26)의 상황을 말한 것인데,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요동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시기는 위만조선이 건국되기 전으로, 고조선(단군조선)시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요동의 위치인데, 고대의 요동과 지금의 요동은 그 위치가 다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과 ‘삼국지(三國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에 있었으므로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고조선과 진의 국경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어디일까.

‘사기’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의 요동은 갈석산(碣石山) 지역이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효무본기(孝武本紀) 등에 등장하는 갈석산의 위치는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는 지금의 갈석산과 일치한다. 난하 하류 유역이 고대의 요동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보다 1,000리 서쪽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고대의 요동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사기’ 몽념열전(蒙恬列傳)에는 ‘국경에 쌓은 만리장성이 임조(臨조)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진서’(晉書) 당빈전(唐彬傳)에는 ‘만리장성을 복구했는데 갈석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만리장성의 끝 부분이 요동의 갈석산 지역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십구사략통고’의 지도에는 발해의 서북부에 요수(遼水)가 그려져 있고 만리장성이 서쪽으로부터 이를 관통하여 요동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는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와 요동의 서남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다. 갈석산을 끼고 흐르는 큰 강은 난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말하기를 갈석산은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갈석산은 노룡현(盧龍縣)에 있는데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만리장성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전’이 편찬된 당(唐)시대의 노룡현은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이었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은 난하 하류 유역에 있는 지금의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앞에서 소개한 문헌들에서는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되었으며(또는 끝났으며) 그 지역이 요동이었다고 했는데 ‘태강지리지’에서는 만리장성이 낙랑군의 수성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점이다.

수성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하나였다. 낙랑군은 이전에는 위만조선의 영토였고 그 이전에는 고조선 영토였다. 그러므로 위 기록은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이 원래 고조선 영토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갈석산이 국경선상에 있었음을 말한다.

낙랑군 수성현은 원래 고조선 영토 가운데 맨 서쪽 국경 지대에 있었으며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는 갈석산을 서쪽 경계로 하여 그 동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갈석산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에 위치하여 그 동쪽은 고조선이었고 그 서쪽은 중국이었던 것이다.

난하 유역의 갈석산이 서쪽 경계

여기서 요동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요동이란 원래 동쪽의 먼 곳이라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가장 동쪽의 국경지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이동하였다.

오늘날 요동이 고대의 요동보다 동쪽에 있는 것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어 중국의 영토가 지금의 요하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고증으로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는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서기 전 3세기 진시대의 상황이다. 그런데 진시대보다 앞선 시기에도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이보다 동쪽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서쪽에 있었음을 알게 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염철론’(鹽鐵論)에는 연(燕)나라는 갈석산을 요새로 하여 사곡에 의해 끊기고 요수로 둘러싸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전국시대의 상황을 말한 것인데 당시 연나라는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진 제국보다 앞선 전국시대에도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갈석산과 지금의 난하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傳)의 은전(殷傳)과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서기 전 1100년께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고조선이 서기 전 1100년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인데 ‘한서’ 지리지와 ‘진서’ 지리지에는 후대의 낙랑군 조선현이 바로 옛날 기자가 망명해 살았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현은 수성현과 함께 낙랑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기자가 망명해 살았던 곳은 갈석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전 1100년께도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는 난하와 갈석산 지역이었으며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서한은 초기에 고조선과의 국경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옛 국경 초소를 수리하여 그곳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서한은 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므로 이 기록은 진·한시대 이전에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난하 유역보다 서쪽에 위치한 적이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대체로 난하와 갈석산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때로는 그보다 훨씬 서쪽에 있기도 했던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예(濊)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상황인 것이다.

당시 예는 지금의 함경남도 일부와 강원도 지역을, 옥저는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고구려는 평안북도와 중국의 길림(吉林)성 남부 및 요녕(遼寧)성 동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이 모두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 한사군급열국기(漢四郡及列國紀)에는 한(삼한)과 부여를 포함한 비류·시라(신라)·고구려·남옥저·북옥저·예·맥 등 여러 나라는 고조선의 단군을 계승한 나라였다고 하였다. 이 지역들이 고조선의 영토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부여는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과 동일한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나라에 제천의식이 있을 때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연일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이를 부여에서는 영고, 고구려에서는 동맹, 동예에서는 무천, 한에서는 5월제와 10월제라고 하였다.

부여는 언어와 법칙 등 여러 가지 일들이 고구려와 대부분 동일하였고 고구려 사람들은 부여의 별종이라고 생각하였다.

고조선 사람들, 신라 건국의 중심세력

종교와 언어 그리고 풍속까지 같아지기 위해서는 같은 나라 안에서 오랜 기간 함께 생활하면서 깊은 문화적 교류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부여·고구려 등 여러 나라가 독립국이 되기 이전 이 지역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었던 나라는 고조선밖에 없다. 이로 보아 부여 지역도 고조선의 영토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는 오늘날 중국·몽골의 국경을 이루는 얼구나하와 중국·러시아의 국경을 이루는 흑룡강을 북쪽과 동북쪽 국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북쪽과 동북쪽 국경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는 ‘강화도의 마니산 산마루에는 참성단이 있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이라고 한다’고 하였고 ‘전등산은 삼랑성이라고도 하는 바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이 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유적들은 지금도 그러한 전설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경기도 지역이 고조선의 영토였음을 알게 해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옛날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산골 사이에 나뉘어 살아 여섯 마을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진한 6부로 되었다가 신라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 그 남은 백성들이 진한의 6부를 형성했다가 신라를 건국한 중심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신라 건국의 중심세력은 북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유민이라면 당연히 그곳에서 이주해 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남은 백성’(遺民)이라고표현했지 ‘흘러들어 온 백성’(流民)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이들은 일찍이 진한의 6부였다가 신라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진한은 신라가 건국되기 전 한(삼한)시대의 그 지역 명칭이다.

이로 보아 이들은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그 지역에 살았던 토착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신라가 건국되었던 지금의 경주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과 같이 한(삼한)에도 5월제와 10월제라는 제천의식이 있었다. 그 기간에 행해지는 의식이나 풍속이 거의 같았다. 이러한 종교적 풍속의 동일성은 오랜 기간 같은 나라 안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이를 공유해야만 형성되는 것이다.

한(삼한)에는 국읍에 하느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한 사람씩 있었고 그 거수국(제후국)에는 소도라는 종교적 성지가 있어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종교를 계승한 것이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고조선에는 신시라는 종교적 성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신단과 신단수가 있었다. 소도는 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상의 여러 가지 사실들은 한(삼한) 지역도 고조선의 영토에 포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삼한)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남쪽 해안선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제왕운기’ 한사군 및 열국기에는 한(삼한)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고조선의 단군을 계승했다고 했는데, 위에서 살펴본 여러 가지 정황들로 미루어 그것은 그 영토까지를 포괄한 의미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남쪽 국경은 한반도 남부 해안선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종합하면 고조선의 국경은 대부분의 시기 서쪽은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 북쪽은 얼구나하, 동북쪽은 흑룡강, 남쪽은 한반도 남부 해안선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고조선은 지금의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영토로 하는 큰 나라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 자료로도 뒷받침된다. 적석총·석곽묘·석관묘 등 석재를 사용한 무덤들과 고조선의 대표적 무기인 비파형 동검이 난하를 경계로 하여 그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고 그 서쪽의 중국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난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가 동일한 문화권, 동일한 통치 지역에 속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에 서쪽 국경에 변화가 있었다. 서기 전 190년대에 난하 하류 유역에서 위만조선이 건국되어 그 영토를 대릉하 유역까지 확장함에 따라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대릉하 유역이 되었고 그 후 서기 전 107년에 지금의 요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됨에 따라 지금의 요하가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명칭을 처음 사용한 문헌들

· 한국에서는 고려 인종때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처음이다. 고려 충렬왕때 일연 선사가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썼다.
·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자가 지은 ‘관자’(管子)라는 책이 처음이다. 이후 ‘사기’ ‘상서’ 등에 조선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출판호수 2003년 10월호 | 입력날짜 2003.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