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문 시론)

 

          덜 숙성한 포도주의 씁쓸함

  -도올 김용옥의 국학강좌(MBC-1/5 23:00)를 보고

 

 

 도올의 열정은 뜨겁고도 가슴 벅차다.

 그는 나이들지않는 이시대의 눈이며 열망이다.

 그의 독특한 목소리,어딘지 째지는듯한 불협화음마져 우리들의 가슴에 정겨움으로 울리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그의 강좌를 듣기위해 몰려든 사람들에게서 오랫동안 진리에 목말라하던 우리민족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제는 모든 학문적 성과가 군중앞에 벌거 벗은채로 무대에 올려져 봉사하며 평가받아야 할 시대라고 생각한다.지식을 특정한 집단안에 가둬둔채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로 패스워드를 채우고 권력화하던 시대에서 대중속으로 뛰쳐 나옴은 지극히 바람직하기 까지 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올은 이나라 시대정신을 이끌어가는 몇 안돼는 지성중의 하나라고 평가된다.끊임없는 변신과 시도는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것이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심성조차 달아오르게 한다.그런 그의 모습을 나는 좋아한다.그래서 관심있게 지켜보고 이런 글을 쓰게 되는지 모른다.

 도올이 우리 국사,우리 조상의 삶에 관하여 자긍심을 지녀야 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분의 과도한 열정이 혹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릇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이글을 쓴다.

 먼저 그분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열정어린 자세로 일반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시야를 열어준다는 점에 경의를 표한다.그분의 해박한 지식과 정열만큼이나 수많은 시청자들이 참가하는 공개강좌가 지식의 대중화라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다.더구나 필자로서도 그분의 해박하고 중심잡힌 강의가 불확실한 시대에 하나의 지표로서 작용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그분의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필자의 기대는 점차 실망으로 변하고 드디어는 우려와 걱정으로 바뀌는 것이 비단 나 뿐만이 아닐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그분의 역사인식에 조금은 편협한,어쩌면 우려할만한 쇼비니즘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언어구사(일본X 이라거니 미국X등)에서 전률할 만한 증오가 배어남을 보았다면 필자의 노파심일가. 필자의 단견이었으면 좋겠다.아니 그분의 나라사랑,민족주의 성향이 자연스럽게 분출하는 모습으로 우리만의 술자리였으면 더욱 좋겠다.

이런점은 방송진행자들이 사전에 주의를 주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반만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우리민족의 자존심은 욕설로서 보상받을 만큼이나 값싸고 헤픈 것이 아니다.이시대의 지성이요 석학이라 할만한 분의 입에서 그런 용어가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코미디를 보는 후련함보다 섬뜩한 수치심을 느꼈다는게 솔직한 고백이다.적어도 우리국민의 수준이 이제는 세계를 향해 당당하게 서도 모자람이 없다고, 올림픽과 월드컵경기를 치르면서 실증하고 자부해왔기 때문에 더 그러는지 모르겠다.

 다음으로 그분이 말하는 내용중에 우리역사에 실학운동이 있었느냐는 반론에 대하여 필자는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분은 말씀하신다.정약용,유형원등 일부 선각한 유학자들이 임란(임진왜란)이후에 실사구시의 저작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굳이 실학운동이라고까지 말할 것은 못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일련의 학문적 경향을 서양사학에서 말하는 근대화의 붕아라고 해석하는것이라면 이또한 또하나의 사대주의 식민사관이 아니냐고 통박하였다.

 역사에서의 시대구분을 반드시 서양사학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그분의 견해에는 공감하지만 그렇다고하여 일제시대에 우리의 역사학자들이 이루어놓은 성과까지 부정할려고 하는 것은 또하나의 자기부정이고 사대주의가 되지 않을지 의문이다.

 일제식민지하에서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사 깎아내리기의 주제로 당파싸움과 궁중여인비사,그리고 사대주의 의존사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사는 마치 왕을 둘러싼 여인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붕당간의 당파싸움이 전부이며, 인민의 의식은 사대주의에 절어 주체적으로 생존을  못하는 민족으로 단정하고 인식시킬려고 온갖 잔꾀를 동원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한가지 방법으로 일제는 조선의 근대화와 개국, 그리고 독립을 자신들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견강부회(牽强附會 : 합당하지 않은 말을 하며 떼 쓰는 짓)했다.

이와같은 암울한 시기에 선각한 역사학자들이 일제의 침탈행위가 결코 우리에게 근대화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며,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자신의 주체적 각성과 노력으로 발아하고 성장하여 왔음을 강조하고자 실학'운동'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였음은, 광복운동만큼이나 의미있는 일이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는 것이라고 한다.도올 자신의 표현으로서도 모든 역사는 史觀을 담고 쓰여지는 것이다.실학을 운동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 역사학의 성과이며 독립운동만큼이나 의미있는 작업이었다.이를 평가절하함은 서양사에서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을 빼놓고 얘기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양사에서 르네상스가 전쟁이나 시위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고하여 이를 운동(Movement)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結社나 집단행위로 표출되지 않았다 하여 우리역사에 실학운동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무식이며 망발이다! 또하나의 物神主義 事大史觀이라 할 것이다.

 역사에서 운동(Movement)이란 표현은 다양하게 사용된다.

 사건 사고의 집적 내지 모자이크가 곧 역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프랑스혁명기에 발표된 시에에즈(Sieyes)의 짧은 논문  '제3계급이란 무엇인가?'(1788)는 하나의 지적 산물이지만 누구도 그것이 혁명의 중요한 촉매였음을 부인하지 못한다.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인간의 근원을 밝히려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제기되고 성숙되어 왔던 섶에 시에에즈가 불을 붙인 것이다.수많은 군중이 모이고,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배후에는 일관되게 그들을 지도한 사상이나 이념이 존재한다. 이념은 인간행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동력(動力)으로 작용한다.따라서 역사적 사건은 그 저변을 형성한 사상적 흐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아니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눈은 표출된 개개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에서 서술해야하는 부분이 더욱 중요하다.시각화된 사건은 대양의 표면에 이는 파도이나,거대한 해류는 표면의 파도치는 부분과 상관없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한다.이를 감지하고 천착함이 바로 역사학의 임무다.

 이어서 그분은 역사발전단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견해를 비판하는 비유로서 인간의 성장과정을 들었다. 지극히 부적합한 비유였다.고대를 유아기로,중세를 청년기로,근대를 장년기로 비유하였다. 지금 이나이에 중세의 청년기를 누가 나쁘다고 할 것이냐며 흥분했다. 청중들은 실소했다. 용어에 가치평가를 곁들이는 것은 순전히 도올 자신의 주관이다.더구나 역사에서 과거를 재단하고 평가함은 현재와 미래를 바람직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과도 일치한다. 바로 역사학의 존재가치이기도 하다는 점을 도올은 망각하고 있다.

 더불어 도올은 역사에서 시대구분을 강조하는 입장은 예외없이 맑스주의자라고 말한다.

 역사의 발전단계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는 문제는 역사학의 기본입장에 연결되기도 한다.고대와 중세,근대로 구분함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역사기술의 편의에서 이기도 하고,문명사로서 상당기간에 걸친 대변혁을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하다.얼마든지 다른 시각이 가능하다.그런 구분이 딱히 부러지도록 명확한, 그리하여 단절된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더구나 그런 변화와 흐름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일수만은 없다.그중에는 우여곡절도 담겨져 있게 마련이다.그러나 갈등하면서 전진하는 것만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그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생명있는 것들은 희망이 있기에 존재한다.지나온 시대의 역사에서 인류는 다가올 희망을 읽는다.

 지적동물인 인류는 더욱 그러하다.나의 삶, 우리의 현재가 새로운 미래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고 여길때 참고 견딜만 하다.그런 희망을 송두리채 버리라고 주문함은 지나치고 잔인하다.오늘 해가 지는 것은 내일 다시 더 밝은 해가 뜨기위한 기울음이고, 오늘 잎이 시들어 지는 것은 봄에 더 빛난 신록을 피우기 위해서라고 해석함이 가치있다.물론 도올의 평가절하는 그런대로 의미있는 일이라고 받아 들인다. 역사가 발전한다는 인류의 희망을 더욱 소중하게 가꾸는 것이 역사학의 임무임을 깨우쳐주는 한도에서 말이다.

 맑스는 역사발전단계를 생산양식에 초점을 맞추어, 원시공산사회에서 노예제 봉건사회로,노예제 봉건사회에서 자본제사회로, 자본제사회에서 공산사회로 회귀한다는 법칙을 정립하고 그의 이론을 적용하였다.

역사에서 발전단계를 논하고,봉건제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분하는 것이 어떻게하여 맑스주의인지 필자는 이해하기 어렵다.맑스는 고대 원시공산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형태로 상정하였을뿐 결코 근대예찬론자가 아닌 것이다. 그는 근대의 자본제사회를 악으로 보았으며, 자체모순으로 괴멸한다고 보았지 발전단계의 바람직한 현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도올은 강의 말미에 현재의 노무현정권이 지향하는 가치나 존재이유를 참으로 의미있게 해석해주어 한편으로 가슴 후련하고 든든한 느낌이었다.지극히 안심이 되었다.우리의 선장이 흔들릴 때 더많은 충격과 회오리에 휩싸였던 국민들이었다.이시대의 양심이라 할 도올의 입으로 그런 평가를 받으니 국민들도 조금은 안심이 될 것이다.더 나아가 국민이 선출해놓은 대통령을 너무 흔들고 다리 걸어 일 못하게 한다며 질타하는 장면에서는 아연 긴장하였다.

그러나 바로 직전에 조선시대의 당쟁이 정권투쟁이며 정치의 부패를 막아주는 지극히 합리적인 시스템이었다고 극찬하여 박수를 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모순이고 공허하기조차 하다.조선의 당쟁이 정상적인 권력투쟁이며 권력의 부패를 방지하는 절묘한 자기정화장치였다면,현재의 야당이나 언론의 비판은 어찌하여 부도덕한 것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가 명치유신으로 이룩한 결과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는 이미 그와같은 문화를 향유하며 살았다고 말하였다.맞고도 지당한 말씀이다.문제는 우리의 자존심이 야만의 발굽아래 여지없이 유린당했다는 사실이다.우리의 역사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족적은 얼마든지 자랑하고도 남을만큼 고귀한 것이었다.다만 이를 지킬만한 힘을 지니지 못했었다는 점에서,그리고 아직도 우리의 국력이 침략자 일본에 훨씬 뒤져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상처난 자존심은 지금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참하게 유린당한 자존심을 회복하기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과정에 있다.하루 세끼 걱정을 안하게 되었다고 반세기에 걸친 민족의 수난과 치욕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제국주의자 일본은 다시 미국과 손을 잡고 아시아의 패권을 손에 쥐려 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을때까지 비굴할 정도로 미국에 충성하며 기회를 노린다.

그들이 쓸개를 핥으며 복귀할 기회를 노리는 시간 우리는 자기도취에 빠져 있지나 않은지 돌아 볼 일이다.그들은 우리를 적당히 추켜주며 취하게 만든다. 월드컵을 통해서 더욱 그러한 음모가 드러났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그때의 취기를 헤어나지 못한다.실익이 없는 칭찬에 우쭐대며 우리는 마치 세계를 정복한냥 착각속에 일년반을 보냈다.그동안에 세계질서는 눈부시게 재편 내지 정돈되어 가고 있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지금 당장 한풀이 화풀이로 우리자신이 기분 좋아 취하면 우리의 후손들은 또다시 굴종과 치욕의 세기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일제는 패망한 이후로 그들이 신으로 모시는 천황이 일개 정복군사령관에게 졸개처럼 굽신거리며 생존을 구걸해 오늘을 이루었다.패전국 일본이 50년을 굴종하며 보류했던 자존심은 이제 주변국 눈치보지않고 신사참배하는데까지 가게 되었다.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예나 지금이나 바뀜이 없다. 그들은 국제사회에서 손잡고 연합해야할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점에서,그리고 그들의 힘이 상대방을 결정적으로 치명타 할 수 있을 때까지 드러내지 않고 기다린다는데서 우리와 다르다.100년전 우리는 영국과 미국을 제쳐두고 기껏 골목깡패에 불과한 일본, 그리고 이미 명을 다해 쓰러져가는 중국과 러시아에 의존할려고 우왕좌왕 했었다.말하자면 줄기나 뿌리를 버려두고 말라 죽어가는 곁가지에 정성을 쏟은 셈이다. 우리가 대상을 잘못 선택하여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일본은 영국(동맹)과 미국(밀약)을 손짓해 불러 연합한 것이다.그 결과 조선은 예정된 순서대로 지역깡패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은 100년전보다 더 치열하게 거래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글로벌 사회다.

누구와 손을 잡고 연합하느냐 하는 것은 시간여유를 주지않고 국가의 존망을 가름한다.지구상에서 독자적 생존능력을 지닌 국가는 현재 미국뿐이다.우리나라의 처지는 더욱 절박하다. 일본은 어느새 한국은 물론 중국까지도 안중에 두지않고 행동할 정도로 성장하였으며 방약무인(傍若無人)해졌다.그들은 이 시기를 맞기위해 50년동안 미국의 발밑에서 굽실거리며 살아왔다. 미국은 벌써 일본이 배신하지 않을 나라라고 착각하기에까지 이르렀다.미국의 마음을 읽지 않고서 일본이 그처럼 오만한 행동을 할 수 없다.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드디어는 세계전략에서 일본의 회생을 도와주고 말았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일본을 선택하도록 버려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실수다.우선은 미국의 세계전략에 코드를 맞춰야 한다.그리하여 미국으로서 중국의 성장이 우려할 만한 것이듯이 일본의 재무장 등장은 아시아의 불안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또다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득하여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 제국을 연결하는 전략적 리더쉽이 필요한 때이다.

유럽과 러시아는 하나의 종속변수로 내려 앉았다.현실적으로 미국과의 연결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에게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가장 중요한 일에 너무 소홀한채 국지적 소모전에 몰두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모든 지식인들조차 거품같은 인기영합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도올조차 예외가 아닌 듯하여 실망스럽다.

 우리는 현재 눈앞의 작은 이익을 추구하여 미래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식인은 자신의 발언이 역사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 웃음을 선사하는 코메디언과 다르다.국가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한풀이나 개그맨식의 말투는 당장 우리 마음을 후련하게 해줄망정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은 아닌 것이다.

우리자신의 것이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는 자긍심을 일깨워줄려는 그분의 뜻을 이해한다하더라도 역사를 운운할려면 그만한 감각과 전략적 사고도 함께 지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미국의 무기체제는 한반도에 지상군을 유지하여야 할 필요성이 과거와 판이하게 달라진 상황이다.실질적으로 선제공격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세계유일의 국가로서 전세계에 걸친 재배치(Transformation)는 오래전부터 예고되어 왔다. 미국은 새로이 성장하는 중국을 가장 큰 위협으로 상정하고 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미국이 지상군을 철수하느냐가 아니라,아시아 신질서에 누구를 동반자로 선택하느냐의 문제에 집중된다.거기에는 새롭게 조명받는 아시아태평양 시장의 동업자로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서 비롯한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상대방선택의 기준으로 신뢰(Trust)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명백하다.특히 상인적(商人的) 사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일시적 이해를 따라 우왕좌왕하는 개인이나 국가의 신뢰지수가 몇점일까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우리는 또다시 우방을 잘못 선택하는 100년전의 어리석음을 되풀이 할려고 하고 있다.그런점에서 自主를 빙자한 그의 對美觀은 대중영합이며 시대착오적이라 할만 하다.

 도올은 말한다.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비추어,우리가 아무리 미군철수를 부르짖어도 미국은 떠나지 못한다고...일면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런식으로 공중매체를 이용하여 우방을 발가벗기는 실례는 국민감정을 오도할 우려가 심각하다.더구나 현재의 국제정세와 무기체제는 50년전의 상황과 너무나 많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우려는 현실적이다.한마디로 그의 강변은 한말(韓末)의 감상적 애국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는 국제관계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라는데서 또하나의 비극을 잉태한다.

우리시대를 이정도로 한풀이 하며 살다 가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다.국제적 감각을 살려 우리민족의 생존과 번영과 도약을 도모하는 전략적 사고가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이제는 달라져야 한다.제자리에 멈춰 서는 것은 낙오이며 추락일 뿐이다.

기다렸던 도올선생의 공개강좌를 보고난 느낌은, 이제 그분의 한계를 보는 듯 하여 씁쓸하다.준비도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잘못된 편견을 고집하고 강조하는 모습에서 연민까지 느꼈다.마치 덜 숙성한 포도주를 대하는 기분이라고나 해야 할가.

역시 그분은 동양의 고전을 알기쉽게 해석해주는 본연의 모습에서 그쳤어야 했다. 백화점식으로 전지전능함을 과시하기보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모습도 성공 만큼이나 아름답다.

 

                            2004.        1.           6.

 

                             박           상           문      

                           (국제미디어통신 경영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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