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가 서양 문명사에 끼친 영향]제지술이 인쇄 문화 꽃피웠다

포로 통해 화약·나침반 등 전파

지배선

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부대를 격파한 사라센 제국은 무수한 전리품을 챙겼다. 대표적인 것이 종이 만드는 기술이다. 사라센은 이 제지술을 서방세계에 전했고, 이에 따라 인쇄문화가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됐다. 1925년에 발행된 토머스 프란시스 카터가 저술한 책에는 제지술의 서방세계 전파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저서는 오늘날 문헌정보학에서 고전이 될 정도로 중요한 책이다.

대식국의 관습에 따라 탈라스에서 패배한 당군 포로는 모두 노예가 되었다. 탈라스에서 포로가 된 중국인 제지공이 사마르칸트로 보내진 후 그 제지공에 의해 제지 공장이 만들어졌고, 거기서 생산되는 종이는 ‘사마르칸트 종이’로 불리면서 사마르칸트의 명물이 되었다. 사마르칸트의 종이는 칼리프가 지배하던 아랍 국가들로 빠르게 확산됐다. 한 세기 지나 주니스가 869년에 썼던 것처럼 ‘서에서는 이집트의 파피루스, 동에서는 사마르칸트의 종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지술은 인기였다.

고선지 휘하의 병사를 포로로 잡은 사람은 샤리프의 아들 지야드였다. 그들 중에는 제지공이 있었다. 그때부터 종이 제지가 서방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후 11세기의 저술가 사리비는 종이 전파로 그때까지 사용되던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와 양피지가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종이는 다른 것에 비하여 훨씬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용하기에 좋고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1100년경 이집트의 제지업은 같은 이슬람 지역인 모로코에 전파되었다. 다시 1150년경 제지술 모로코를 경유하여 스페인으로 전달되었다. 이와 같은 제지술의 전파는 이슬람의 해상활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오늘날 아프리카 북부 지역을 이슬람이 석권하게 된 것은 그들이 해군력과 상업활동으로 지중해를 제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무렵 스페인에 최초로 제지술이 전파되었다. 이슬람의 해외 통상 활동은 세계의 모든 지역이 망라되었다. 예를 들면 인도양과 남지나해는 물론이고 고려시대의 한국까지 그 범위에 들어갔다. 당시 중국의 광둥(廣東) 지방에 아랍인의 특별 거주 구역이 설치될 정도로 이슬람의 해외 진출은 적극적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종이는 이탈리아 시실리의 것인데, 1109년의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아라비아어와 라틴어로 쓰여진 로저 2세의 증서가 그것이다. 1276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종이공장이 몬테파노(현재의 파블리아노)에 설립되었다. 그 결과 14세기에 이탈리아는 유럽의 종이 공급처로 스페인과 다마스쿠스를 압도하였다. 그러한 제지술은 북유럽으로 전파되었고 한편으로는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필라델피아로 흘러갔다.

화약이 전파된 것은 고선지의 사졸들이 사라센 군에 포로가 되어 그들에 의해 전래된 듯싶다. 이때 폭약과 같은 화약이 서방으로 전래되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당에서 화약이 전쟁무기로 사용된 때는 탈라스 전투보다 40년이 지난 후이기 때문이다.

784년 11월 당의 장수 이희열이 유흡의 장군이 되어, 고구려인 이정기의 아들 이 납의 부하였던 고언소가 사수하는 송주(지금의 상구)를 공격할 때 화약을 이용한 화공법이 사용되었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언제부터 화약이 전쟁에 사용되었는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귀한 자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화약이 서구에 전래된 시기를 탈라스 전투가 끝난 시점에 맞추는 이유는 간단하다. 언제 어떠한 경로로 화약이 서방에 전래되었는지 알려주는 자료가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침반 역시 이 시기 아랍에 포로가 된 고선지의 부하에 의해 서방세계에 소개된 듯싶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지남침은 송나라의 심 괄(1031∼1095)이 지은 ‘몽계필담’의 ‘잡지’에서 처음 언급되고 있다.

자석에 대한 중국인들의 노하우가 서구로 전해진 계기를 당의 군인들이 대거 아랍의 포로가 된 탈라스의 패전에서 찾는 것은 타당할 듯싶다. 아랍측 사료에 따르면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중국인 병사의 수가 2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제지술이나 화약제조술, 혹은 나침반의 원리를 꿰고 있는 자들이 분명 섞여 있었을 것이다.

이후 이슬람인들에 의해 나침반이 종교의례(성지 메카를 향해 절을 할 때 방향을 잡는 데 활용)와 항해에 이용되었으며, 이것이 유럽으로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역사적 상식에 속한다.

탈라스 전투의 패배로 당의 사졸 대부분이 사라센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 ‘통전’의 저자 두우의 일족으로 ‘경행기’의 저자인 두환도 사라센의 포로가 되었다. 두환은 751년 고선지 장군을 따라 탈라스 전투에 참전했다 패전으로 포로가 되어 지중해까지 끌려간 뒤 대식의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는 762년 페르시아만에서 상선에 편승해 광주를 거쳐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던 인물이다. 이로 인해 사라센에 대한 사정이 중국에 소상히 알려지게 되었다.

위의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중앙아시아가 불교권에서 무슬림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탈라스 전투가 동서 교류사에 남긴 흔적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학자 르네 그루세는 “지야드 이븐 살리히는 수천 명의 포로들을 사마르칸트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이 역사적인 날이 중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언급했다.

초기 사건의 일반적인 추세로 예견되었던 중앙아시아가 중국화 대신 무슬림화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케르룩의 지원을 받은 지야드 이븐 살리히가 고선지 장군의 부하 수천 명을 잡아갔다는 내용이다. 그 결과, 탈라스 전투는 동서 교섭사에 흔적을 많이 남긴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중국문명이 아랍권으로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가 무슬림화되었던 시작이다.
 
출판호수 2003년 10월호 | 입력날짜 2003.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