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의 서역 원정길]‘3分法’ 공격전술로 吐蕃國 정벌

만년빙하 절벽길 통과

지배선

선지(高仙芝·?∼755) 장군은 747년 당 현종으로부터 비밀 조서를 받는다. 토번(吐蕃, 지금의 티베트)을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이전 당나라는 서북방절도사 개가운(蓋嘉運·?∼741)·전인완(田仁琬·741∼742)·부몽영찰(夫蒙靈察·742∼747) 등이 토번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세 번씩이나 실패했다.

그 결과 토번이 서북변 20여 국으로 받던 조공을 중간에서 차지해 버리자 당은 고선지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고선지의 파미르 고원 횡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이때의 정황을 당시 중국 정사인 ‘구당서’의 ‘고선지전’에서는 ‘현종은 특별히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임명하면서 기병·보병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번을 토벌하라는 칙서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영절도사란 군사를 거느리고 이동하는 작전지역에서 황제의 권력을 위임받아 마음대로 조치할 수 있는 특수부대의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이다. 당나라 역사상 행영절도사는 고선지 외에 단 한 명만 임명될 정도로 드물었던 관직이다.

고선지는 토번 정벌을 위하여 그해 3월 말부터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쿠처와 톈산 산맥 중간의 남방지역으로 현재의 新彊성 高車현)를 출발하였다. 이때 기병과 보병 1만명이 동원되었다고 하나 사실은 모두 각자의 말을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횡단하는 대원정이었다. 사서에서는 고선지가 언제 현종의 칙서를 받았는지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없지만 대략 747년 정월 경인 것 같다.

반면 토번을 공격하기 위한 원정군이 3월 하순경에 출정하였던 고선지의 독자적인 결정인 듯싶다. 이전에 고선지는 서역의 우전·달해 정벌(740년경)에 성공하였다. 우전은 쿤룬(崑崙) 산맥 북쪽이며, 달해부는 톈산 산맥의 서쪽 끝에 위치하였다. 이는 파미르 고원 일대의 지리를 고선지가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건들이다.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쿠차에서 출발한 후 15일 만에 발환(撥換)성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발환성은 쿠차에서 지도상 직선 거리로 300km를 넘지 않는다. 그런 거리를 말을 타고 행군하는 데 무려 보름이나 소모됐다는 사실은 그만큼 험준한 지형을 통과하였다는 뜻이다. 산술적으로 보자면 고선지 부대는 하루에 20km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했다는 계산이다. 물론 안서의 쿠차에서 발환성까지의 길 상태가 평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산악지대와 하천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실제 행군 거리는 족히 400km 이상 될 것이다. 게다가 안서도호부의 남방 지역 대부분은 토번의 침입이 잦아 행군하기에 매우 불안한 지역이었다.

토번 정벌을 위한 3개월의 대장정

고선지 부대는 발환성에서 10여 일 더 진군한 끝에 악비덕(握毖德)에 이르렀다. 악비덕은 발환성에서 남서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이므로 실제 거리는 300km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기병들의 행군 속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부대가 행군하는 코스가 험악한 곳이어서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큰 장애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일 듯싶다.
악비덕에서 10여 일 더 진군한 끝에 소륵(疎勒, 타림분지의 북서부 오아시스 도시로 파미르 고원을 넘을 때의 요충지. 오늘날의 카스)에 이르렀다. 소륵은 비단길의 남북 양도가 서로 교차하는 타림분지내 교통의 요충지였다. 바꾸어 말하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방으로 가기 전에 상인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르던 곳이다.

악비덕에서 서남쪽으로 거의 300km나 떨어진 곳이 소륵이다. 그렇다면 이 구간은 종전보다 빠르게 하루 30km를 행군하였다는 계산이다. 이는 악비덕-소륵 간의 길이 앞의 경우와 다르게 평원이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고선지 부대는 타림분지를 남방으로 끼고 서쪽으로 계속 진군해 갔다. 그리하여 고차도독부에서 출발한 지 약 40여 일 만에 소륵도독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행영절도사 고선지는 소륵의 지휘관 소륵수착사 조승빈과 함께 파미르 고원으로 향했다. 이때 토번 정벌을 위해 소륵수착사에게 합류하도록 명령하였던 것은 고선지의 직함이 행영절도사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소륵에서 20여 일 진군한 끝에 총령수착(지금의 타쉬쿠르간)에 이르렀다. 총령수착이 위치한 곳은 파미르 고원 남쪽 끝이다. 앞의 방식대로 우회거리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300km 정도인데, 부대의 행군 일수는 무려 20여 일이나 소요되었다. 총령이 워낙 가파른 산악이기 때문에 앞으로 진격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총령수착에서 다시 20여 일을 진군한 고선지 군대는 파미르 고원의 가장 높은 지점을 넘어 파밀천(播密川, 오늘날 파미르 강)에 이른다. 이때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의 연운보를 정복하기 위해 1만명의 군사와 보급품을 실은 군마와 함께 험준한 산악을 횡단하였다.

그때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정도의 외길을 통과해야 했다. 파미르 계곡의 파밀천에서 다시 서쪽으로 20여 일을 진군한 끝에 특륵만천(特勒滿川)에 이른다. 특륵만천에 있던 나라는 오식닉국(五識匿國)이다. 오식닉국은 오늘날의 타지키스탄 령이다. 이는 고선지가 공격하려던 토번의 요새 연운보의 서북에 위치한 나라다.

종합해 보면 현종의 밀명을 받은 고선지가 자신의 휘하 부대를 거느리고 쿠차를 출발하여 특륵만천에 도착하는 데 무려 3개월 이상이나 걸렸다. 그야말로 고선지 부대의 토번 정벌을 위한 이동은 대장정이었다.

고선지 부대가 오랜 기간 행군하면서 필요한 식량 등의 물자는 앞서 언급된 쿠차 본영·발환성·악비덕·소륵·총령수착·파밀천·오식닉국을 병참기지를 적극 활용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앞의 오식닉국을 제외한 지역들은 규모는 작았지만 당의 변방 요새였다.

공격 날짜와 시간까지 지정한 현대 전술 구사

특륵만천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고선지의 부대는 토번의 최북방 요새 연운보(連雲堡)로 향하였다. 연운보는 중국의 서쪽 끝과 파키스탄 사이에 낀 아프가니스탄의 영토로, 지형적으로 매우 험난한 산악에 위치하였다. 지금의 파키스탄의 사르하드가 바로 이곳이다. 연운보가 보이는 험준한 산악에 자리잡은 고선지는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연운보를 향하여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또 고선지는 현대전을 방불케 하는 날짜와 시간마저 지정하였다. 7월13일 진시에 연운보 앞에 집결하도록 작전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던 것이다. 연운보의 토번 병사들은 당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였던 상황에서 고선지 부대가 들이닥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선지는 작전계획대로 토번 연운보를 쉽사리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때 5,000명의 전사와 민간인 1,00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또 고선지는 많은 군수물자와 군마 1,000필 등 엄청난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고선지는 지치고 병든 병사들을 남기고 연운보를 출발한 지 사흘 만에 탄구령(坦駒?) 정상에 도착하였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길에서 최대 난코스가 탄구령이었음은, 이를 연구하는 서양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였던 사실이다. 탄구령은 무려 해발 4,600여m나 될 뿐만 아니라 만년 빙하세계가 펼쳐지는 험악한 산악이다.

탄구령을 오를 때 고선지 군사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소 부족 등의 고산병에 만년 빙하를 지나는 엄청난 추위가 더해진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탄구령을 내려갈 때 고선지의 부대원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길을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병을 만나기라도 하면 피할 방법이 없다. 이런 탄구령을 올랐다가 하강한 까닭은 탄구령 넘어 토번의 속국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정벌하기 위해서였다. 토번의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소발률국을 정벌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였다.

이때 고선지는 가파른 절벽을 내려가는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휘하 병사를 소발률국의 병사로 위장시키는 심리전을 썼다. 탄구령을 내려갈 때 위장한 병사들이 소발률국의 왕을 대신하여 고선지 병사들을 환영한다는 계획이었다. 험악한 산악에서 탈진한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한 고선지 장군의 고도로 계산된 전술이었다.

이와 같이 출중한 전술과 전략을 구사한 고선지의 노력으로 고선지 휘하의 병사들은 소발률국을 점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이하의 등교 절단 작전까지 성공하면서 토번의 서방세계 진출을 봉쇄하였다. 고선지의 출중한 전략과 전술로 토번이 의도하던,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구축하는 일이 상당기간 불가능하였다.
 
출판호수 2003년 10월호 | 입력날짜 2003.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