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仙芝의 중동정벌    高仙芝의 중동정벌2

‘東西 문명교류의 아버지’ 고구려 유민 高仙芝 장군

‘한국인이여, 세계를 네트워킹하라’



이덕일

친이 군인이었던 것이 고선지(高仙芝·?~755)에게는 행운이었다. 당 태종이 645년 고구려 정벌에 나서면서 “짐이 지금 동정(東征)에 나서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 전사한 자제들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고구려는 중국에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그런 만큼 당 조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 유민들을 중국내 여러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그러나 고선지는 부친이 군인이었던 덕분에 고구려 유민들의 집단 거주지에 갇혀 신음하는 대신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당나라는 669년 ‘고구려 인민들 중 반란자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고구려 유민 3만8,300호를 강남(江南)·회남(淮南) 등 중국내 여러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켜 감시했으나, 고선지는 이들 지역에 갇히는 대신 안서군(安西郡) 사진교장(四鎭校將)인 부친 고사계(高舍鷄)를 따라 갈 수 있었다. 안서는 현재의 신장(新疆)성 쿠처(高車)현으로 당의 북서쪽 최전방이자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고선지는 출신보다 능력이 중시되는 이 변방에서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고, 서슴없이 그 가능성에 자신을 던졌다. ‘구당서’(舊唐書) ‘고선지전’(高仙芝傳)은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안서(安西)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의 공로로 말미암아 유격(遊擊)장군에 임명되었다. 고선지는 나이 20여 세가 되어 장군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버지와 관품(官品)이 같게 되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이 지역에서만큼은 고구려 유민들에게도 능력 발휘의 기회가 주어졌다. 안서 서쪽의 토번이 그만큼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토번은 추수가 끝난 중국 서북부의 곡창지대를 습격했을 뿐만 아니라 아랍 제국과 연합해 무역의 이익을 가로채고 중국을 고립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 무렵 고선지가 토번 정벌의 한 축이었던 것은 당 조정의 기류와도 맞아떨어졌다. 재상 이임보(李林甫)는 이민족들에게 변방 방어를 맡기는 번장기용정책(番將起用政策)에 대해 현종의 재가를 얻었는데, 이는 중앙 정치권과 연결되어 있는 한장(漢將)보다 이족(異族) 출신 번장(番將)들이 중앙 정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안록산(安祿山)·가서한(哥舒翰)·고선지 등의 이족들도 절도사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인적 네트워크의 중요성 알았던 ‘세계인’

비단 이런 정책이 아니었더라도 고선지는 한족(漢族)들과 배타적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고선지가 발탁해 후계자로 삼았던 봉상청(封常淸)은 한족(漢族)이었는데, 그가 봉상청을 중용했던 이유는 그가 보고서를 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고선지는 민족을 가리지 않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할 줄 아는 세계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뿌리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구려 유민들을 토번 공략에 참여시켜 지위 향상을 꾀했다. 전임 절도사들이 거듭 패하자 747년 현종은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승진시키며 기병·보명 1만명을 거느리고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구당서’ ‘고선지전’은 ‘이때 보병이 다 자신의 개인 말을 가지고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노획물 획득이 주된 참전 동기였던 고대에 보병들이 자신의 말을 가지고 따랐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써, 이는 보병들이 고선지와 공동운명체 의식을 가졌음을 뜻한다. 이는 결국 고선지를 따랐던 보병들이 고구려 유민들임을 추측하게 해 주는 부분이다.

원한 맺힌 고구려인들이 참전한 부대가 강할 것은 불문가지여서 높은 사기와 빠른 기동력을 지닌 고선지 부대는 깎아지른 듯한 외벽 아래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외길의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중요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현 파키스탄 동쪽의 Sarhad)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고선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아노월성(阿弩越城:소발률국의 수도)을 점령하기 위해 얼음으로 덮여 있는 해발 5,000여m의 힌두쿠시 준령을 넘었다.

고선지는 위기 때마다 고구려계 심복들을 미리 배치하는 전략으로 아노월성을 점령해 토번과 아랍 세계의 연결을 단절시킨 다음 그해 9월 소발률국 왕과 토번 공주를 대동하고 개선했다.

그의 이런 성공을 시기한 절도사 부몽영찰은 고선지를 “개의 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놈”이라고 욕하면서 제거하려 했다. 부몽영찰(夫蒙靈察)은 한때 고선지의를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로 승진시키기도 했으나 자신이 실패했던 정벌을 성공시키자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환관 변령성이 “고선지가 놀라운 공을 세웠는데도 지금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걱정하게 되었다”고 상주함으로써 부몽영찰은 자신의 자리를 고선지에게 내주어야 했다.

안서절도사 고선지는 조정의 명령만 집행하는 단순한 지방관이 아니라 이 지역과 서역, 당의 관계를 조절하는 사실상의 군주로서 독립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 750년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던 석국(石國) 정벌에 나선 것은 고선지가
“석국이 번신(藩臣)으로 예를 갖추지 않는다”며 조정에 주청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석국이 아랍세계와 연결되면 서역 정세가 크게 변화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원정에 나선 것이었다. 이 선제공격에서도 크게 승리한 고선지는 석국 왕을 체포해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서안)까지 압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석국 왕 압송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장안의 무능한 문신들이 석국 왕을 사형시키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 소식에 분노한 토번 부족과 이슬람 제국(압바스朝)은 대당동맹을 맺고 안서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고선지는 서역에 대한 주도권 상실을 우려해 선제공격으로 대당동맹을 깨뜨리기로 결심했다.

이 원정때 세계사에서 유명한 탈라스 전투가 발생했다. 고선지는 여러 민족을 네트워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당군(唐軍)과 번군(蕃軍:이민족 군대)으로 구성된 3만명의 연합군대를 조직했고, 751년 7월 서역 700리 깊숙한 곳까지 진격했다.

고선지 부대는 닷새 동안이나 대당연합군과 대치했으나 돌궐족의 한 지파인 갈라록(葛羅祿:케르룩)이 반란을 일으켜 대당동맹에 가담했다. 이 내부반란으로 고선지군은 대당연합군에 대패하고 고선지도 포로가 될 뻔했으나 부장들의 적극적인 엄호로 겨우 안서로 귀환했다.

이 한 번의 패전은 고선지의 모든 기왕의 성취를 앗아갔다. 이 패전으로 그는 서역 경영에서 손을 떼야 했고, 그 대신 왕정견(王正見)이 안서절도사가 되었다. 752년 그의 수하 봉상청이 사망한 왕정견을 대신해 안서절도사가 되었으나 부대 지휘권을 빼앗긴 고선지는 장안에서 거주해야 했다.

소수민족 출신의 그가 한번 무너지자 비난이 잇따랐다. 심지어 석국 정벌까지 소급해 비난했는데, ‘구당서’ ‘고선지전’에서 ‘선지는 본성이 탐욕스러워 석국에서 푸른색의 커다란 보석 10여 석(石)과 황금덩어리를 얻었는데, 그 양이 낙타 대여섯 마리가 끌어야 할 정도로 많았다. 또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말과 보석도 얻었다’며 과거 칭송하던 석국 정벌까지 비난했다.

안록산의 반란과 고선지의 최후

이런 비난을 묵묵히 견디며 장안에서 거주하던 고선지를 다시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은 안록산의 반란이었다. 그는 안록산의 반란이 중국 전역을 뒤흔들던 755년 밀운군공(密雲郡公)으로 봉작받았다.


현종은 아들 영왕(榮王)을 토적원수, 고선지를 부원수로 삼았는데, 영왕은 상징적인 존재였을 뿐 출정하지도 않아 고선지가 사실상 토적원수였다. ‘구당서’에 ‘고선지 등이 출정할 때 현종이 근정루에 나와 이들을 전송했다’는 기록처럼 고선지의 출정은 풍전등화에 빠진 당 조정의 희망이었다.

고선지에 앞서 진압사령관이 되었던 봉상청이 패전했기 때문에 고선지 부대의 출정은 더욱 중요했다. 고선지는 낙양과 가까운 섬주(陝州)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봉상청이 섬주를 포기하고 동관(潼關)을 지킴으로써 장안을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판단한 고선지는 동관으로 철수하기 전에 봉상청과 함께 중요 군사보급기지인 태원창(太原倉)의 돈과 비단을 장교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반군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동관 사수 전략은 큰 성과를 거두어 낙양(洛陽)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동관을 공격하던 반군은 격퇴당했고, 위기에 빠졌던 당 조정은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환관 변령성이 고선지를 공격했다. ‘구당서’는 ‘변령성이 매번 고선지의 작전에 간섭했으나, 고선지가 그의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고 적어 두 사람의 견해 차이가 원인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당 조정은 안록산이 이민족인 판국에 이민족인 고선지가 당군까지 장악하면 당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한때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부몽영찰이나 변령성이 모두 적으로 돌아선 것은 고선지의 인적 네트워크에 문제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했다.

변령성은 “봉상청이 군심을 동요시켰으며, 고선지는 섬주 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국고 물품을 훔쳐 나누어 주었다”고 상주해 봉상청과 고선지를 참하라는 현종의 명령을 받아냈다. 봉상청을 참한 변령성은 칼잡이 100명을 따르게 한 다음 고선지를 불러 “대부(大夫)에게도 역시 명이 있다”면서 체포하려고 했다. 칼잡이 100명을 따르게 한 것은 고선지에게는 목숨 걸고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기 때문인데, ‘신당서(新唐書)’ ‘고선지전’은 이때의 정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선지는 곧 급히 내려가 말하기를 ‘내가 (섬주에서) 후퇴한 것은 죄를 지은 것이라서 이 때문에 죽는다면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보고 창고의 식량을 도적질했다고 하는 것은 모함’이라고 하고 또 휘하의 사졸들을 둘러보고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모집했던 처음의 의도는 적을 격파하고 나서 큰 상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적의 기세가 이 순간에도 무성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져 어쩔 수 없이 동관을 지키고 있다. 내게 죄가 있다면 너희들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가하다. 그렇지 않다면 억울하다고 외쳐라’라고 말하자 군중에서 모두 ‘억울하다’고 외쳤는데, 그 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때 고선지가 반란을 선동해 안록산과 합세한다면 당조(唐朝)는 당장 무너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봉상청의 시신을 보고 “그대는 내가 선발했고 또 나와 절도사를 교대했는데, 지금 그대와 함께 죽으니 이는 모두 운명”이라면서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였다. 그는 고구려 유민으로서 당과 싸우기보다 당의 발전에 걸었던 자신의 선택에 끝까지 충실했던 것이다.

세계인 고선지는 이렇게 모함으로 죽어갔지만 그의 인생 유전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탈라스 전투때 체포된 포로들에 의해 제지술·나침반 등 중국의 여러 기술이 서방으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의 패배가 곧 세계사 발전의 한 계기가 되었으니 고구려 유민으로서 그의 인생은 실패함으로써 성공하는 역설의 인생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