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리 민족의 ‘북방기원설’은 ‘조선의 순록유목 기원설’로 대신할 수 있다. 시베리아의 생태환경으로 보아 시원적인 유목은 순록유목이고 ‘조선’이라는 이름 자체가 또한 순록유목과 직관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방기원설에는 다시 스키토-시베리아 기원설과 오르도스 기원설이 있지만 앞의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몽골 학계의 그것도 대동소이하다. 앞의 설은 북극해의 습기가 톈산(天山)산맥 등의 고지대에 부닥쳐 형성된 녹지대인 천산북로라는 스텝-타이가로드를 위주로 이루어진 민족의 형성 및 이동을 전제로 한 것이고, 뒤의 것은 그 지역을 넘어 몽골 고원과 고비(半사막)의 연장선상에 있는 황하 상류의 만곡부를 중심으로 추정해본 것이다.

시베리아는 史料의 보고

지금은 교통이 열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는 누구나 몽골 고원과 시베리아의 물이 거의 모두 북류해 북극해로 흘러들고 그 동부의 물은 남류하다가 북동류하기도 하면서 태평양으로 흘러든다는 것을 안다.

하천의 하류로 갈수록 습도가 높아져 동토지대가 아니라면 혹한기를 피할 경우 생산하기에 편하고 생물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상식이다. 한여름 알타이산의 기온이 영상 30∼40도에 이르고 일조시간이 18시간여나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몽골 고원 북쪽에 눈을 돌리는 우리 민족의 바이칼호 기원설은 충분히 고려될 수 있다.

시베리아 조선족이 조선 겨레일 가능성이 있다면 시베리아의 생태사를 살펴야 한다. 시베리아는 스텝-타이가-툰드라 지대로 이루어진 거대한 벌판이다. 아시아 대륙의 4분의 1이고 지구 육지의 10분의 1이나 된다. 침엽수림 위주로 구성된, 지구상에서 가장 드넓은 타이가라는 ‘숲의 바다’는 수많은 짐승들의 서식지다.

그리고 이런 생태권은 한 편으로는 대서양까지 이어지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북아메리카 지역에 이른다. 여기에서 ‘시베리아의 황금’이라는 ‘모피’(fur)가 주산품으로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베리아가 우리에게는 겨레의 역사적 태반을 찾아 가는 어마어마한 ‘사료의 보고’로 떠오르고 있다. 조선·부여·예·맥·고구려·선비·백제·신라·발해·거란·여진·몽골이 모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시베리아의 주산품인 모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과 고려(바른 발음:코리 또는 고올리)가 순록, 맥(고구려)이 너구리, 부여가 부이르(숫수달), 몽골이 엘벵키(너구리), 발해가 늑대 또는 이리, 타타르가 수달, 솔롱고스가 족제비과에 속하는 솔롱고(黃鼠狼)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근래까지도 사람이 모이면 모피의 유무를 묻고 어떤 모피인가를 확인하면서 모피 거래를 시작하고는 한다. 그리고 어떤 모피를 주산품으로 하는가에 따라 그 동네 사람들을 곰족·너구리족·늑대족·수달족·호랑이족 등으로 호칭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관행에서 생겨난 부족 이름이 대부분인 것이다.

DNA 분석으로 실증

우랄 산맥 너머 모스크바에 못 미치는 곳에 ‘고미 공화국’(고대 원주민은 황인종)이 있고 물론 대통령도 있어 짐승 이름의 나라가 있음이 지금도 확인되고 있다. ‘맥국’이나 ‘예국’은 예외이기만 할까. 발해 대조영의 ‘대’(大)도 ‘큰 대’자가 아니고 다구르족의 daa와 마찬가지로 ‘진짜의’나 ‘토박이’라는 뜻이라는 것이 다싱안링(大興安嶺) 현지 에웽키족이나 다구르족 학자들의 견해다. 당연히 경청할 만한 견해다. 우리 민족 기원사 연구도 그 발상의 일대전환을 요구받는 시대권에 이미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몽골의 수미야바아타르 교수는 부이르 호 남쪽에 있는 고올리칸 훈촐로의 상이 동명성왕상이라고 주장한다. 고올리족과 고리(槁離;고려) 그리고 바이칼 호 올콘 섬을 시조지로 하는 코리족은 호수 동쪽인 눈강 상류-할힝골(훌룬부이르) 언저리를 근거지로 삼았던 것 같다. 몽골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들이 같은 계통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이에 관한 분석이 이뤄진 것은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SBS-TV의 ‘몽골리안 루트를 가다’ 제작팀은 데옥시리보핵산(DNA) 검사로 이를 실증했으며 최근 서울대 의대의 이홍규 교수는 이를 좀 더 발전시켜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재검증해내고 있다.

DNA방식은 구미의 언어·인류학자들이 추정하던 퉁구스족의 기원지 알타이~바이칼 사이의 사얀산맥 소욘(鮮)족에 관한 연구에도 적용됐다. 그 결과가 2001년 졔 뺘르추크가 쓴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지에 관한 연구’라는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지가 사얀 산 일대임을 실증하고 있다.

러시아쪽의 연구도 있다. 모스크바대학의 러시아과학원 일반유전학연구소장 자하로프 교수는 DNA검사 결과 아메리카 원주민과 밀접하게 직관돼 있는 것으로 밝혀진 우리 민족 또한 이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으리라는 가정 하에 한국인과 소욘족의 혈연적 관계 규명을 위한 검사에 착수했다.

소욘족은 산 이름에서, 퉁구스족은 그 산에서 흘러 나오는 강 이름에서 비롯된 종족 이름이다. 바이칼 호 지대라는 개활지로 진출하려면 상당한 힘의 축적이 전제된다. 그들은 그에 앞서 알타이 산의 많은 부분이 해발 4,000여m가 넘는 고산들로 형성되어 있어 외부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고, 비교적 풍족한 수량과 드넓고 비옥한 땅들을 기반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었으며, 여기서 힘을 비축하고 인구수를 늘린 다음에야 바이칼 지역으로의 진출이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1999년 8월 다싱안링 북부 오룬춘 기(旗)를 답사하면서 ‘선’(鮮)이 순록의 겨울 주식인 이끼(蘚)가 나는, 스텝과 사막의 연장선상에 있는 비교적 밋밋한 작은 산임을 입증하고, 조선(朝鮮)의 ‘조’자가 아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찾음’을 뜻하는 글자임을 싱안링(興安嶺) 선비족 기원지와 지린(吉林)성 조선족자치구를 현지 조사해 확인했다.

또 중국어사전을 참고해 ‘조선’이 이끼(蘚)가 나는 새 땅을 찾아다니는 ‘순록유목민’을 의미하는 시베리아 원주민의 토박이말임을 나름대로 밝혀 보았다. 이른바 ‘조선의 순록유목 기원설’이 되는 셈이다. 이끼는 응달에 많이 나고 습기가 많을수록 잘 자라므로 조선 겨레들은 서시베리아쪽에서 산지를 따라 태평양이 있는 동쪽으로 ‘이끼의 길’(라이켄 로드;Lichen Road)을 찾아 이주해 왔으리라는 추론도 해 보았다.<관련글프 참조>

‘붉은악마’ 신드롬

아울러 몽골의 맥(貊) 고올리 기원설을 선보이며 맥이 ‘Ussurian Racoon Dog’이라는 학명을 갖는 너구리임을 훌룬부이르대학 생물학과의 황학문 교수와 함께 다싱안링 현지 조사를 통해 입증했다. 또 최남선 선생의 ‘불함문화론’에 나오는 불함(不咸)은 ‘밝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붉음’을 뜻하는 것임을 시베리아-몽골-만주 현지 연구를 통해 정리했다.

현지 원주민들에게는 타이가의 자작나무와 물가의 버드나무가 신앙의 대상이다. 버드나무 중에서도 붉은 가지 버드나무가 특히 그렇다. 나나이족 말로는 버드나무를 아예 푸르칸(purkan)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대로 burqan(不咸: 하느님)으로 적을 수 있다. 만주에는 ‘보드마마’굿이라는 무당굿 메뉴가 있는데 ‘버들어머니’굿으로 ‘버들꽃’을 의미하는 주몽의 어머니 하백녀 유화(柳花)에 대한 모태회귀신앙과 접맥된다는 논문이 1993년에 조선족 최희수 교수에 의해 발표됐다.

그래서 ‘길림성야생경제식물지’에 보면 조선버드나무(朝鮮柳)의 별명이 붉은 버드나무(紅柳)다. 물가의 버드나무 분포 밀도로 보아 전 몽골리안루트-스텝로드에 걸쳐 분포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혁거세’라는 이름도 붉을 ‘혁’(赫)자를 사용해 혁거세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밝음’이기보다 무당의 색깔인 ‘붉음’을 상징색으로 하는 제사장 종족을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2002년 6월 우리의 잠든 영혼을 강타한 ‘붉은악마’신드롬을 적어도 이 정도의 역사적 안목은 가지고 그 뿌리를 천착해 봐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반달을 보고 미인의 눈썹을 떠올리지만 몽골인들은 갈비를 떠올려 반달을 ‘갈비달’이라고 한다. 우리는 함박눈이 하얀 솜처럼 펑펑 내린다고 하지만 몽골인들은 함박눈이 ‘비개처럼’ 쏟아진다고 한다. ‘흰색’이 숭앙되는 주된 원인도 겨울이 긴 시베리아의 순록 주식인 이끼 떼가 흰색이어서 주로 ‘흰 먹을거리’(차가안 이데)와 연관된 데 있다고 한다. 봄과 여름 사이에 몽골초원에 굶어 쓰러진 마소며 양들의 시체를 보면 이들의 이런 인식관행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주채혁 강원대 사학과 교수

1943년 서울 출생. 연세대 사학과 졸업. 同대학원 동양사 박사. 한국몽골학회장. 저서 ‘몽골사회제도사’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