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추적] 몽골 칭기즈칸 무덤 발굴의 진실

칭기즈칸 무덤도 저주도 없었다…발견된 성벽은 거란족 것
“뱀 출현”은 거짓말… “나돌았다”던 역병은 구제역

▲ 칭기즈칸(1162~1227)적에게는 무한한 공포와 전율로,아군에게는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불과 20만명의 병사로 17년 만에 유라시아대륙의 절반 이상을 정복한 만인의 황제.
최근 몽골과 미국 합동 발굴단이 몽골 북동부 어글럭친골 헤렘에서 칭기즈칸이 묻힌 곳을 발굴하다가 중단했다고 해서 미국 신문과 외신에 크게 보도됐다. 발굴 과정에선 수천 마리의 뱀들이 출몰하고 전염병이 도는 하늘의 저주가 있었다는 외신이 전해져 흥미를 돋우었다. 그러나 몽골 전 총리가 “칭기즈칸이 잠든 신성한 땅을 단 몇달러에 더렵혀서는 안된다”고 공개 반대하면서 발굴작업은 중단됐다. 또 몽골 현지 전문가들은 발굴단이 지적한 지역을 칭기즈칸의 무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칭기즈칸 무덤의 진실은 무엇인가. 국내와 몽골의 두 칭기즈칸 전문가의 글을 싣는다.

유라시아대륙에서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불빛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사라져간 역사의 풍운아 칭기즈칸, 적에게는 무한한 공포와 전율로, 아군에게는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불과 20만명의 병사로 17년 만에 유라시아대륙의 절반 이상을 정복한 만인의 황제 칭기즈칸(1162~1227)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칭기즈칸과 그를 따르던 자들의 꿈과 야망을 기록했던 몽골 비사에도 이 부분만은 영원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칭기즈칸의 대몽골제국은 여러 면에서 정말로 신비하기 그지 없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몽골군은 거짓말처럼 오늘날까지 무덤 하나 발견되지 않는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간 신의 군대처럼 기념이 될 만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왜 이들은 동·서양의 역대 제국의 황제나 장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위한 거대한 지하 세계를 만들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그들도 지구에 살았던 것은 분명한 이상 이 세상 어느 곳에 묻혀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 ‘칸의 무덤’ 800년째 못찾아

칭기즈칸의 매장지는 오늘날만이 아니라 당대에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특히 거대한 무덤 구조물에 익숙해 있던 정착 지대의 사람들에게는 그 궁금증이 핵폭발 직전의 수준이었다. 그러면 먼저 칭기즈칸의 죽음과 무덤에 관한 옛날 사람들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 어글럭친골 헤렘 인근 아라샹하드(샘물바위)북쪽에 위치한 언덕,이 언덕에 칭기즈칸과 관계된 위대한 인물이 잠들어 있다는 구전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중국측 기록인 원사(元史)에는 그가 1227년 음력 7월 5일 청수현(淸水縣)의 서강(西江) 근처에서 발병하여 음력 7월 12일 사아리(sa’ari)평원의 갈로트(gala’utu) 행궁(行宮)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으며 기련곡(起輦谷)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페르시아측의 자료인 집사(集史)에는 칭기즈칸이 육반산의 군영에서 같은 해 8월 15일 운명한 뒤 고난에 찬 어린 시절을 보낸 보르칸산 근처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13세기 때 로마교황청이나 남송에서 몽골로 파견된 사신들의 여행기에도 그의 무덤에 관한 추정 기록이 있다.

위에서 언급된 기련곡이나 보르칸산은 오늘날 몽골국 동부 헨티 아이마크의 서북변 산지인 이흐헨티산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미 당대(當代)의 어느 누구도 그가 영원히 묻힌 곳을 알아낼 수 없었다. 이미 당대에도 그 무덤의 존재는 수수께끼였다. 오직 전설로만 존재할 따름이었다. 그 전설은 8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의 주변을 흐르고 있다.

오늘날 칭기즈칸의 매장지에 대한 전설은 바이칼 주변에서부터 내몽골에 이르는 각 지역에 모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무덤이 어디에 존재하건 간에 먼저 알아야 될 상식은 ‘모든 왕들은 한곳에 매장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대몽골제국이나 대원제국의 제도상 그 무덤 일대는 코빌라이칸까지 포함된 역대 제왕들의 집단 왕릉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몽골국에서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몽골이 자본주의의 길을 택한 1991년부터이다. 그 첫 주자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몽골과 합동으로 칭기즈칸이 태어난 곳이자 몽골의 성지인 고르반골(오논강, 헤를렌강, 톨강) 유역에 대한 대대적인 고고학 발굴과 지표 조사를 행했다. 그리고 조사가 끝난 1994년에 칭기즈칸의 묘를 찾았다는 대대적인 발표를 했다. 가토신페이(加藤晋平)와 같은 학자는 자기 눈으로 묘까지 확인했다는 기사를 일본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일본의 탐사 진짜 목적은 광물자원 조사

그러나 이 발표에 온 몽골이 흥분에 휩싸이기는커녕 돌아온 반응은 차가운 냉소였다. 몽골인들은 이 조사작업의 실제 목적이 동몽골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구리나 우라늄 등 광물자원에 대한 조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몽골인들의 관습이나 유물 보존의 한계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그곳을 파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사자(死者)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을 금기시해 왔기 때문이다.

▲ 어글럭친골 헤렘(어글럭친 냇가의 식성):이 석상은 아라샹하드에서 서북쪽으로 약8Km 정도에 위치(동경110도 11분42초,북위48도24분36초,해발 고도1250m)하며 둘레는 약3Km이다. 사진에 보이는 성벽은 남벽으로 길이는 426Km이고 높이는 2~3m이다. 페를레를 비롯한 몽골의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거란의 유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여튼 이 일이 있은 다음 정말 거짓말처럼 해마다 여름만 되면 몽골이나 세계 각국의 신문에는 칭기즈칸의 묘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단골 뉴스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 뉴스는 특정 조사발굴단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올해에는 미국 시카고대학 존 우즈(John Woods) 교수가 이끄는 미국·몽골 합동 발굴단이 동몽골 헨티 아이마크 바트시레트 솜에 위치한 어글럭친골에서 칭기즈칸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특히 올해의 발견은 “이 주변 일대의 고분을 파기 시작하자 언덕을 오르던 차가 뒤집혔고 수천 마리의 뱀이 출현했으며 전염병도 돌았다”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외신까지 전해지면서 극적인 면을 더했다.

정말 그럴까. 그곳에서 과연 칭기즈칸의 저주처럼 그 많은 뱀이 출현했단 말인가. 뱀은 몽골에 무수히 산재한 바위 그림에도 자주 묘사되어 있을 정도로 고대에서부터 유목민들에게 숭상되어온 성스러운 동물이다. 이로 인해 몽골 무당의 무복에는 뱀의 형상을 본뜬 물체가 주렁주렁 달려 있으며 가장 강력한 천하장사에게 내려주는 칭호도 바로 성스러운 뱀을 뜻하는 아브라카이다. 이러한 뱀이 발굴 때 수천 마리씩 집단으로 출현했다는 것은 정말 하늘의 경고라고 간주해도 좋다.

그러나 진실은 잠시 유보될 수 있지만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발굴에서 뱀이 집단으로 출현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같은 사실은 몽골국 발굴 참가자나 관련 학자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또 역병이 돌았다는 것도 실제는 7월 초부터 이 지방에서 발생한 구제역에 불과하다.

●공산주의 시대 칭기즈칸은 ‘악인’으로 왜곡

필자는 이전에 어글럭친골 헤렘(성벽)이 위치한 아라샹하드(샘물바위) 일대를 세 번이나 답사하여 현장 조사를 행한 바 있다. 아라샹하드는 고대 몽골족의 성지인 코르코나코 조보르라고 간주되는 곳이다. 어글럭친골 헤렘은 샘물바위에서 서북쪽으로 8㎞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곳에는 거란시대에 축조된 길이 3㎞, 높이 2∼3m 가량의 성벽이 아직도 남아 있다. 또 그 주변인 세르벵할카 지역에는 거란 글자가 수직 암벽에 새겨져 있다.

즉 미국 발굴팀이 소위 말하는 어글럭친골 헤렘은 칭기즈칸의 묘를 둘러싼 보호벽이 아니라 이미 학계에서 공인된 거란 성벽의 흔적일 뿐이다. 필자가 아는 한 이 일대에서 칭기즈칸과 관련된 설화는 칭기즈칸이 잠시 이곳에서 그의 라이벌인 자모카와 함께 유목을 했다는 것과 샘물바위의 북쪽 언덕에 칭기즈칸과 관계된 위대한 인물이 잠들어 있다는 것뿐이다. 즉 칭기즈칸의 무덤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곳이다.

몽골 역사나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곳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불쑥 나타난 배경이 무엇일까. 이번 조사 발굴에 몽골측 담당자로 참가한 바자르구르 박사는 이 고향 출신이지만, 지리학자일 뿐 역사나 고고학자는 아니다. 사실 우즈를 비롯한 학술조사단의 실제 목적은 스티븐 시걸이 주연하는 영화 칭기즈칸의 촬영장소 물색에 있다고 보는 편이 진상에 가깝다. 칭기즈칸 무덤 발견 운운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일 뿐이다.

몽골의 전 총리인 ♥바수렝은 어글럭친골에서의 칭기즈칸 무덤 발굴과 관련하여 분노에 찬 편지를 신문사나 대통령에게 발송했다고 한다. 편지의 요지는 몽골 국민의 동의도 없이 몽골 지역에 분포된 성스러운 무덤들을 파헤치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의 말은 1991년 개방 전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만용이라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1991년 전까지 칭기즈칸은 가장 극악한 인간 백정이자 제국주의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은 내외몽골을 합쳐 모든 몽골인들에게 1921년 이후의 몽골 역사만 배우도록 강요했다. 이로 인해 몽골인들은 칭기즈칸의 역사를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칭기즈칸의 이름만은 입과 입을 통해 소중히 간직되어 내려 왔다. 몽골에서 정부의 법령에 의해 칭기즈칸이 복권된 때는 1991년이다. 그 이후 몽골인들의 칭기즈칸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라 할 정도로 스피드하게 변해 갔다.

그 스피디한 변화의 모습을 필자의 두 가지 경험담으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가 빠를 것이다. 첫 번째 사례는 필자가 1991년 몽골 장군 집에 초청받아 갔을 때의 일이다. 그는 부관들이 없는 틈을 타 나에게 칭기즈칸 군대가 러시아를 지배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칭기즈칸이 러시아를 지배했다는 사실은 세계사에 나와 있는 당연한 사실. 그렇다고 하자 그도 그런 사실을 얼핏 들었다고 하면서 잠시 명상에 잠기다가 나에게 보드카를 권했다. 두 번째 사례는 1992년 중부 지방을 답사할 때 겪은 일이다. 지방의 목민들이 “코빌라이칸은 칭기즈칸의 동생 혹은 아들이다”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나에게 판결을 구했다. 그 간단한 판결 덕분에 필자는 큰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93년부터 칭기즈칸의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또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칭기즈칸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칭기즈칸에 관한 책이나 글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구(舊)소련에 의해 은폐돼 있던 칭기즈칸의 역사가 다시 햇볕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흘러간 역사를 유심히 바라보면 이상하리 만큼 앞뒤가 모순되는 아이러니를 만날 때가 많다. 바로 칭기즈칸이 그러한 예에 속할 것이다. 몽골 역사에서 칭기즈칸의 꿈과 길이 사라진 어느 훗날 우연치고는 너무 극적이라고 할 만큼 칭기즈칸은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했다. 오늘날 몽골에서 그 옛날 칭기즈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면 모두 침묵을 지킨다. 그리고 엄숙한 얼굴로 눈을 감는다. 바로 칭기즈칸은 끝없는 몰락으로 인해 흩어질 대로 흩어지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의 후예들에게 단결과 미래의 희망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박원길 칭기즈칸연구센터 소장·역사학 박사)

 ◈“칭기즈칸 무덤은 몽골 동부에 있다”

칭기즈칸에 관한 연구 가운데 일반인들의 흥미를 끄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칭기즈칸의 무덤 논쟁일 것이다. 최근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장, 러시아 변방의 보리야트, 카자흐스탄의 칭기스산, 몽골의 어글럭친골 헤렘 등에서 칭기즈칸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무덤의 주인공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칭기즈칸의 무덤은 현존하는 동·서양의 역사 사료들을 연구해 볼 경우 분명히 몽골의 동부 지역인 고르반골(3개의 강이란 뜻으로 오논강, 헤를렌강, 톨강을 말한다) 유역에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묻힌 이흐호리크(大禁域)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같은 원인은 같은 이름을 가진 지명이 많고 또 그것을 명확히 구분할 역사지리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몽골의 역사·고고학자인 페를레는 ‘이흐호리크는 어디에 있나’라는 논문에서 칭기즈칸이 묻힌 곳은 이흐헨티산맥의 보르칸칼돈산이 분명하다고 간주하고 있다. 그는 이 산의 기슭에서 13∼14세기의 것으로 판명된 유물이 발견되었고 산의 동북쪽에 있는 “이흐 가즈린 다와(지명)”는 몽골 비사의 “에케스 가자르(지명)”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등을 입증의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현재 몽골의 대다수 학자들은 페를레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올해 몽골·미국 합동 발굴단이 헨티아이마크의 바트시레트 지역에 위치한 어글럭친골 헤렘이라는 곳에서 칭기즈칸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합동 발굴단은 돌로 쌓은 성벽인 어글럭친골 헤렘을 이흐호리크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이 추측을 입증하기 위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지만 몽골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현재 발굴은 일시 중단된 상태이다. 몽골인들이 발굴에 반대하는 이유는 칭기즈칸 등 몽골 조상들의 시신은 그 누구도 함부로 범해서는 안되며 또 그들이 묻힌 성소(에케스가자르)는 국가의 엄격한 보호 감독 아래 있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이 합동 발굴단의 차후 활동 여부는 몽골 정부의 결정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이러한 발굴 중단 사례는 1991∼1993년 몽골·일본 합동의 ‘고르반골 조사발굴단’ 때에도 발생했다. 당시 몽골·일본 합동 조사단은 무덤의 발굴을 포기하는 대신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을 만한 곳들을 조사한다는 선에서 몽골 정부와 합의를 보았다. 몽골·일본 합동 조사단은 고르반골 유역에 산재한 고대 분묘나 도시의 유적들을 세밀하게 조사하였다. 또 각종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각 유적의 연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점도 제시하였다.

당시 그들도 어글럭친골 헤렘을 조사한 바 있는데 이 성벽은 각종 비교 조사를 통해 볼 경우 10세기 거란시대의 유적임이 분명하다고 단정하고 있다. 이같은 결론은 이들에 앞서 이곳을 연구했던 페를레의 주장과도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금년도 몽골·미국 합동 조사단이 어글럭친골 헤렘을 칭기즈칸의 무덤을 감싼 성벽이라고 발표한 것은 어딘가 성급한 면이 있다고 보인다.

몽골·미국 합동 조사단이 만약 칭기즈칸의 무덤을 발견한다면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현재 몽골에는 고고학적 발굴을 총체적으로 지원하고 또 유물을 과학적으로 복원·보존할 수 있는 현대적 시설을 갖춘 박물관이 한 곳도 없다. 일례로 1998년 남고비 지역의 노욘솜에 위치한 차강 하낭긴 아고이 동굴에서 수습한 일부 유물까지도 제대로 보관할 곳이 없어 현재 유물의 색깔이 변질되고 털 등이 빠지는 등 크게 손상된 상태이다. 사실 몽골의 학자들이 근 80년 동안 수집 발굴한 귀한 유물들도 모두 열악한 보존 환경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몽골 격언 중에 “우유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통부터 준비하라”는 말이 있다. 칭기즈칸의 무덤 발굴도 유물이나 시신을 원상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시스템이 완비된 다음에 행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대로 두는 것이 바로 보호이다.

(S. 촐몬/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교수·중세 몽골사 전공)


2002.09.05